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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문제 - 확실하지 않다.

'대화의 문제'라는 주제로 앞으로 일기 혹은 독후감으로 이루어진 여러개의 글을 작성할 계획이다. 오늘은 대화의 문제를 일으키는 불확실성/불확신 의 문제에 대해 적어보기로 한다. 이에 대한 가장 쉬운 예로, 본인이 열심히 이야기하고있는데 누군가가 그 내용에 대해 '확실해?'라고 갑자기 물어보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이때 나는 90% 정도는 '글쎄...'라고 답할것이다. 그렇게 되면 청자는 대화의 신뢰도에 문제를 느끼고 급격히 관심도가 낮아지는 문제가 생기고, 나는 나 나름대로 '그런걸 뭐하러 물어보나'라고 생각하며 갑자기 말하고픈 의욕을 상실한다.(가끔은 짜증도 난다)


나는 아주 어렸을때부터 인간의 기억을 저장할 '외장 저장장치'가 보편화 될것이라는 믿음하에 적극적으로 기억행위을 부정해왔다. 공부를 할때도 '아니 그런 단순한것을 뭐하러 외워' 라는 신념으로 암기과목은 공부를 일부러 하지 않았다. -- 단순 암기를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행위로 간주할 정도였으니.(수학을 아주 어렸을때부터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암기가 싫어서 이과로 온 경우다) 그 대신에 나는 어떤 현상에 대한 원리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방향으로 학습을 했으며 그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비록 그놈의 수학이 앞길을 가로막았지만)


암기를 하지 않고도 요리조리 피해가면 어찌어찌 잘먹고 잘살수 있다는 사실을 체득했기 때문에 더더욱 암기는 삶에서 멀어져갔다. 그래서 어느 정확한 위치, 이름, 과거에 대한 명백한 사실은 기억하지 않는다. 사실 블로그도 이러한 무암기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운영하는것이다. 이것이 아니었으면 내가 무엇을 공부했고, 무엇을 이룩했는지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나 자신도 그 과거의 사실에 대해 잊어버렸을 것이다. -- 그래서 블로그는 단순한 글 저장의 목적에서 더 나아가 나의 삶을 담고 있는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말이 샜는데, 대화의 관점에서 이러한 특성은, 대화라는것이 대개 과거에 대한 팩트를 교환하는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문제가 된다. 친구들과 어렸을적 이야기를 하면 대개 기억은 못하고, 어렴풋이 기억을 하더라도 말로 팩트를 끄집어 낼 수 있는 정도가 아니기에 과거 이야기가 나오면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여기에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영화 '바람'에서 '그라믄 안돼. 젊은놈이 벌써부터 쳐 건망증에 쳐 시달리고 그렇게 해선 안돼!'라는 대사가 있다.(뜨끔) 이 영화를 몇번 봤음에도 불구하고 이 대사를 기억 못하기도 하고 어느 장면에서 이 말을 했는지 기억을 못한다. 이와 상반되는 내 친구는 영화에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듯한 쓸데없는 대사까지도 성대모사를 하며 줄줄이 외우고 있는데 더 나아가 어렸을적 우연찮게 한번들은 노래도 기억한다. 물론 어렸을적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정확히 잘 묘사해낸다.


그리고 나는 데이터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않는다. 2560원이라고 하면 대충 3000원이라고 기억하고, 301호라고 하면 3층 어디쯤이라고 기억한다. 신호와 소음이라는 책에서 언급한대로 (조만간 이에 대해서도 글을 쓸 생각이다) 베이지안 방식이라고나 할까. 즉 대략적인 가설에 근거하고 반복하여 점차 값에 접근하는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이런 성격과 대조되게, 값의 정확도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사람들과 이야기하는것은 숨이막히는게 느껴진다. 물론 그쪽에서는 이쪽을 보면 답답할것이다. 아무튼,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 정확한 값이 나오게된 경위에 대해 설명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면에서도 대화의 제약이 걸린다. 

예를 들어 오늘 옥션에서 물건을 산 이야기를 한다고 하자. 1000원짜리가 15%할인되어서 850원이 되었는데, 나같은 경우는 '오늘 물건 싸게샀어'로 대화가 끝나게 된다. 반면에 데이터가 들어간 이야기를 한다면 '모바일옥션에서 일반 상품뿐만 아니라 쿠폰도 파는데, 그 페이지에 들어가봤더니 1등상품으로 1000원짜리가 나왔더라, 평소에 10%에도 잘 안 파는 상품인데 이번에는 15%에 팔아서 뒤도 안돌아보고 질렀지'라고 대화가 풍성해진다. 데이터가 제공하는 대화의 풍요로움이 나의 특성으로 인해 사라져버린것이다.


인생을 스펙타클하게 살아온 한사람으로써 충분한 데이터만 덧붙이면 살아온이야기만 나열해도 몇박몇일이 걸릴텐데 데이터가 없으니 '힘들게 살아왔는데 어찌어찌 잘풀려서 지금 이렇게 됐다'라는 1시간도 걸리지 않을 이야기로 삶 전체가 압축이 된다. 압축 효율이 좋을지는 모르겠는데 대화에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큰 '손실압축'이다. 물론 이러한 특성이 업무등에서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아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근데 이제와서 뜯어 고치기에는 너무 늦은것 같다. 우선 글을 마치기 위해 말로만이라도 보완해보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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