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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의 봉인, 나라야마 부시코, 아무르 를 보고


제7의 봉인 (1957)

나라야마 부시코 (1982)

아무르 (2012)

이번 월요일에 처음 글을 게시했었는데, '나라야마 부시코' 네이버 영화 페이지에있는 자극적인 사진을 첨부했다가(모든 사진은 네이버 영화페이지에서 가져왔음) 티스토리로부터 관리자 삭제 처리당해서 어쩔수 없이 사진을 제거한 후 다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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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영화를 꼽자면 위 3개의 영화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각 영화감독들의 다른 작품들도 너무나 맘에들어서 각각에대한 리뷰글을 올리고 싶지만 이런식으로 하나의 주제로 뭉쳐서 글쓰는게 편하기에, 이런식의 아이디어가 떠오를때 적을까 한다. 이 글은 오래전부터 써보고 싶었던 주제였고 특히 요즘 많은 생각이 들어 손이 근질근질했는데 그간 너무 바빠서 글쓸 여유가 없었다. 마침 회사에서 심리상담 신청하면 치킨 기프티콘을 준다고해서 상담내용을 적으려다가, 도통 뭐라써야할지 감이 안잡혀서.. 글쓰려던김에 이 글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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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의 봉인은 그간봤던 수많은 영화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기독교 신앙적 배경이 있을때 더욱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기나긴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기사 안토니우스 블로크는, 부인이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집으로 가는길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페스트로 황폐해진 세상에서 사람들 각각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는 생사에 대해 신에게 해답을 기대하기도 하고, 신에 냉소적/조롱하는 자세를 유지하기도 하고, 신에게 모든것을 맡기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어떠한 해답도 현생에서 얻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기사는 고통스럽고 말도안되는 현실속에서 막연히 가슴속에 박혀있는 신의 존재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원한다. 삶의 이유를 끊임없이 탐구했지만 그는 죽음을 맞이했을때까지도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고, 그나마 마지막으로 '뜻깊은 일'을 해보고자 사신과 체스내기를 하며 생을 일시연장한다. 사신을 이겨보려고 갖은 수를 써보지만 인간이 이를 이길 수 있는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것. 그나마 의미있던것은 그 추가시간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신과 삶에대한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는것?

생과 사를 주관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신 이것은 공포에 질린 인간들이 만들어낸 관념이라면), 인간의 삶은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종국에는 아무런 소득과 의미없이 사라져야하는 허무한 시간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사는 더더욱 삶의 의미를 찾기위해서 신의 존재를 갈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에게서 직접적인 메시지를 듣지 못하였고, 대신 '죄', '악마'와 '신의 형벌'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해석하고 창조해내었다. Dies irae가 불리우는 장면은 기괴하게 과장되었지만, 그것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인 것이다. (FYI, Liszt의 Totentanz는 상당히 좋아하는 곡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 미카엘과 함께 공연을 하며 순수하고 얼간이처럼 지내는 요프 (가끔씩 환상을 본다) 부부와 여정을 함께하며 기사는 잊을수 없는 추억을 간직하게 된다. 혼자서 모든 삶의 근심거리에 대해 걱정하고 탐구하는 기사에 대비하여 그들은 아무런 걱정없이 하루하루 음악과 음식을 즐기며 산다. 그들에게도 언젠가는 사신이 찾아가겠지만 사랑이 충만한 그들에게서, 기사가 느꼈던 정도의 삶의 허무함과 절망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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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의 제목을 살펴보자면 楢山(나라야마)산을 중심소재로 하는, 19세기 말 산골 척박한 동네를 다룬 節考(노래; Ballad)임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인 고립된 산골마을에서는 항상 식량이 부족하기에, 사람의 목숨보다 식량을 더욱 우선시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애기를 낳아서도 죽이기 일상이고, 식량을 훔쳤다가 적발되면 생매장시켜 죽이고, 식량만 소비하고 생산능력이 없는 나이먹은 노인들은 70세가 되면 나라야마산에 가져다 버리는(고려장) 끔찍한 전통이 있다. 

 

이 영화는 70이 된 노모와 그 노모를 살피는 아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비교적 '인간적인 판단'이 가능한 그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인간군상들의 모습은 당시대의 야만성과 무자비함을 드러내며 생과 사에대한 무감각성을 높인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것이 동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들의 아버지는 할머니가 70이 되어 산에 버려야 할때 이를 거부했고, 아들은 그러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다툼끝에 아버지를 죽인다. 그랬던 아들이 어머니를 버려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제7의 봉인에서의 사신이 찾아오는 경우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70이라는 숫자가 지정되었냐 안되었냐의 차이일 뿐 사신은 언제든 찾아온다. 찾아오는 죽음에 맞서 억지로 의미없이 생을 연장하기보다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것, 그리고 각 사람마다의 죽음에 대한 자세가 다르다는 점이 이 영화들을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주제인듯 하다. 어머니는 70이 되자 삶을 마감할 마음의 준비를 하였고, 아들이 나라야마에 데려다 놓았을때 미련없이 아들을 보낸다.

 

가족(손주까지 막 태어났다)과 주변사람들을 돌보며 흐뭇한 미소를 띄던 어머니가 생에대한 미련이 없었겠냐마는, 그녀는 자신의 이빨을 손수 깨뜨리면서까지 삶을 정리하려 하였다. 그리고 나라야마에 눈이 와서 운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아들에게 마찬가지로 미소를 띄며 말없이 작별인사를 하였다. 이때의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기력이 있을때 할수있는 일들을 다해보고, 이제 노년이 되어 이제 말끔히 정리하고 축복의 눈을 맞으며 하늘나라로 가는 자신의 삶이 흡족했을 것으로 감히 상상해 본다. 어머니를 산에두고 집에 돌아온 아들은 다른 가족들이 이미 어머니의 옷가지들을 입고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장면에서 제7의 봉인에서의 마지막 마차 씬과 같은 위트를 느낄 수 있었다. Life goes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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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무르는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던 노부부의 '사랑(Amour)'에 관한 영화이다. (영화에 나오는 피아니스트가 Alexandre Tharaud인 것을 이번에 알게되었다) '사랑해서 죽였다' 라는 말도안되는 표현에 대해 이 영화를 보고나서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은 남들이 지켜봐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것이 아닌, 두 사람간의 긴밀한 감정의 결합이라는 것을 느꼈다. 또한 두 사람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외부인의 당연하고 논리적인 조언이라는것이 얼마나 무의미 한것인지도.

 

누군가는 이 영화가 상당히 지루하고 따분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특히 죽음에 대해 전혀 생각할 필요없는 젊은이들에게있어서는 더욱.. 노부부중 부인은 점차 뇌기능을 상실하여 기억상실부터 시작하여 전신불구까지 이르게 된다. 더이상 삶을 유지하는것이 무의미할 정도. 남편은 그러한 부인을 다양한 방법으로 애지중지 보살피려하는데 본인도 노인인지라 그것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남편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부인과 함께 생을 마감한다.

영화가 고조되면서 거동이 힘들어진 부인과 시시한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남편의 모습이 종종 나오는데, 아내와 함께 보낼수 있는 시간이 얼마남지 않음을 아는 상황에서 무심코 넘겼을 일상의 모습들은 머리속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게 될것이다. 마치 앨범을 뒤적이다가 사진 한장을 보고 옛날 감성에 젖는것처럼 문득문득 그 장면이 떠오르게 되겠지. 특히 영화 막바지에서, 남편은 부인에게 어렸을때 캠핑가서 엽서썼던 이야기, 그리고 그 엽서를 잃어버려 아쉽다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상황과 전혀 관련없는 뜬금없고 시시한 이야기었지만 이 이야기가 모든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좋은기억이든 안좋은기억이든 기록으로 남겼든 안남겼든, 어떤 상황 또는 일상에서 느꼈던 감정의 조각들이 삶을 지탱해주고 의미있게 해주는 추억이 된다는것.

그런 측면에서, 더이상 어떠한 추억을 만들수 없고, 오히려 희망도 없이 주변에게 고통만 주게된다면 이것은 의미있는 삶일까? 병원에 갇혀 생명유지만을 위한 호흡활동을 하는것이 삶에 있어 어떠한 의미를 가지게 될까? 사람이 죽게된다는것은 육체적인 호흡의 중단을 의미하는데, 이를 좀더 확장해보면 정신적인 교류의 차단/중단 이 사망을 의미하는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있지 않을까? 특히 정신적 죽음은 독방에 갇혀 평생을 고통속에서 지내는 무기수의 삶과 다를바가 없어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사람들은 시체에 호흡기를 붙여가며까지 생존을 이어나가고자 하는데 나는 아직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안락사 찬성)

DNA에 박혀진 생존본능과 사회에서의 규칙을 정면으로 상대하면서까지 엄청난 결심을 한 아무르에서의 부부의 결심은 서로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어보인다. 비슷한 장면이 영화 '미스트 (2007)'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나오는데, 아버지는 자식이 끔찍한 괴물에게 먹혀 괴물의 숙주가 되느니 그 자식을 손수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 장면에서 어느 누가 그 아비를 욕하겠는가. 단순히 아들 뒤치다꺼리가 귀찮아서 그런것이 아닌, 상대를 희망없는 영원한 고통에서 '대신' 해방시켜주고, 그리고 그동안의 아름다운 추억을 지키기 위한, 위대한 결심이자 행동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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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옆동네 사시는 와이프 친척분 집을 방문해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그분은 1년전에 남편을 사별하셨는데 아직까지도 그 후유증 때문에 힘들게 사시는듯 하다. 그러는 와중에 내가 고기를 잘굽고 잘먹어서 그걸보시고 만성적으로 아팠던 머리가 잠시나마 안아픈 기적을 경험했다고 한다. 너무 기분이 좋으셔서 모두모여 얘기하는 사진을 찍기도 하셨는데, 사실 이 장면이 이 글을 쓰는 동기이기도 하다. 한동안 상실감에 무력하게 삶을 살다가 한가족이 모두모여 화목하게 고기를 구워먹는 듯한 장면은 그분에게 과거를 기억하게 해주는 매개이자 새로운 추억으로 남겨질것 같다. 

요즘에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되게 감상적이 되어가는것 같다. 예전에는 가족끼리 놀러가려고 하면 '일하느라 한참바쁜데 한가하게 어디 놀러가나'하는 생각을하며 가족과의 시간을 소홀히 했던게 사실인데, 요즘은 그런 계기가 있으면 '어떻게 그 quality time을 풍성하게 보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면에서 요즘에는 가족외의 사람들과는 잘 안만나게되고 가능하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그리고 예전에는 어른들이 애기 많이낳으라하면 그건 옛날에나 가능한 이야기고 요즘은 '현실적으로' 하나 키우기도 힘들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분들의 의도를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비슷한 나이대에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을 흔히 볼수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성공적인 커리어를 위해서 포기한 경우가 종종 있고, 예전에는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곤 했지만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는 못하겠다) 이에대해 '아쉽다' 정도의 표현은 할수 있을것 같다. 결혼생활은 (특히 성공적인 결혼생활은) 그 전의 삶을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를 야기한다. 누군가와 함께 현재의 순간을 맞이하고 미래를 계획할수있다는 것 자체가 그전과는 차원이 다른 depth의 경험과 그로인한 추억을 의미하고, 순간적인 인연들과 아무리 다양하고 자극적인 경험을 하더라도 이정도의 만족감은 얻기 어려울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일에 인생을 바친 사람들을 보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마치 제대로 차려진 식사를 먹으며 사는 사람과 콜라만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같은 느낌이다.

 

결혼의 경험보다 더 큰 경험은 자식과 함께하는 경험일 것이다. 착상의 순간부터 이미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의미있는 (좋든 안좋은 일이든) 추억을 쌓게 되고 아이가 나오는 순간부터 아이를 중심으로 세상의 관점과 환경이 변화되는 경험은 더욱 삶을 다채롭게 한다. 어딜 가더라도 기존에 가지않던 곳, 먹더라도 안먹었던 것, 하더라도 해보지 않았던 것 들을 경험하며 새로운 추억을 쌓을 수있는 좋은 기회가 생긴것이다. 그리고 온 가족이 현재와 미래를 함께 한다는것(제7의 봉인의 마차씬 등장), 그것이야말로 enhanced/advanced experience가 아닌가. (직업병) 그렇게 삶을 살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면 과거의 가족과의 기억들을 회상하며 (아무르 편지씬 등장) 흡족하게 생을 마감하는것 (나라야마 부시코 무덤씬 등장),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삶과 죽음의 방향이다. 신은 거들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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